협의이혼 ‘대문자 I’도 ‘파워 E’가 되는 시간…바다 위 리조트, 크루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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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바쁨의 아이러니
지난 5월25일 저녁, 롯데관광의 전세선 코스타 세레나호가 부산항을 출발했다. 대만 지룽을 거쳐 일본 사세보에 들렀다 돌아오는 5박6일간의 여정이었다.
배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상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 객실 앞으로 배달되는 이 신문에는 당일의 프로그램과 공지사항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몇몇 프로그램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외로 입체감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솟는다.
“크루즈 여행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여행 인솔자 김정희씨의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참여한 첫 프로그램은 솔레 중앙 수영장 앞 광장에서 진행된 ‘그룹 댄스’였다. 수줍어하거나 낯을 가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흥이 ‘완충’된 상태였다.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리듬으로 몸을 흔들었다. 스피커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음악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뒷줄에 서 있던 여행객 정정희씨(62)가 손수 멘토를 자처하더니 내게 소리쳤다. “아니, 이렇게, 방댕이(엉덩이)를 더 흔들어!”
멘토에게 가르침까지 받은 마당에 좀 더 적극적으로 놀아보기로 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밟고 기억력 게임, 빙고, 모자 뺏기 게임까지 빠짐없이 참여했다. 경쟁심에 불이 붙어 결승전까지 올랐다. 아이들보다 먼저 야외 미끄럼틀을 타고 깔깔 웃다가 100m 길이의 선상 트랙 위를 조급함 없이 걸으며 긴장을 풀었다. ‘크루즈는 은퇴한 부모님 세대의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조금씩 흐려졌다.
때론 넘치는 에너지와 요란한 분위기에 한숨 내쉴 곳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갑판으로 향했다. 바다를 마주한 의자에 앉아 몇 달째 펼치지 못했던 소설책을 완독했다. 때로는 목적지를 찾아다니느라 분주한 여행 대신 파도 위에 머무는 이 여유야말로 진짜 쉼처럼 느껴졌다.
선내에서의 유일한 위기는 ‘길치 DNA’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11만4500t 규모, 길이 290m에 달하는 코스타 세레나호는 14층, 1500개 객실, 최대 37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크루즈다. 복도는 어디나 비슷했고, 창밖은 수평선뿐이었다.
무너진 방향 감각을 회복하려면 이성과 직관을 총동원해야 했다. 식당을 찾아 헤매던 중 스마트워치엔 어느새 ‘오늘의 운동량 충족’ 메시지가 떴다. 곳곳에서는 ‘길 잃은 동지들’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러려니, 타이베이
정신없이 1박2일을 놀다 보니 첫 번째 기항지인 대만의 지룽항에 도착해 있었다. 하선 후 기항지 투어로 도착한 곳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이었다.
국민당 정부가 내전을 피해 대만으로 옮겨온 70만점 이상의 문화재 중 약 1%만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 1%가 주는 밀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곳의 대표 스타 ‘옥배추’와 ‘육형석동파육’을 맨눈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이어 시먼딩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만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북적이는 번화가였다. 현지 인솔자 초미미씨는 대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려니’라는 단어를 품어야 한다고 했다. 성에 차지 않아 보여도 그러려니 하다 보면 기대 이상의 감동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려니’ 하며 걸어 다닌 시먼딩은 번화함과 소박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활기로 가득한 도시였다. 소규모 편집숍, 레트로 CD 가게, 직접 그림을 그려주는 캐리커처 부스, 무심한 듯 자리한 헌책방까지 정돈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였다. 바느질 선이 삐뚤빼뚤 살아 있는 천 조각처럼, 이 거리도 그렇게 정겹고 생기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하든 즐거울 것만 같다.
고요한 시간 여행, 사세보
또 하루의 ‘종일 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두 번째 기항지는 일본의 사세보다. 이곳에서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유토쿠 이나리 신사를 찾았다. 이나리는 벼의 신으로 농사, 풍요, 성공을 관장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붉은 기둥이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산허리를 감싸며 펼쳐진 이 붉은 터널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잇는 문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일상의 번잡함은 멀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 고요한 평화가 스며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사세보의 아리타 포세린 파크였다. 사가현 아리타에 자리한 이 테마파크는 독일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을 본뜬 웅장한 유럽풍 건축물과 아리타야키 도자기의 정교하고도 깊이 있는 세계가 이질감 없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공원 한쪽에는 층층이 쌓인 노보리 가마(도자기 가마)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곁을 따라 걷다 보니 수백 년 전 흙과 불을 다루던 한국과 중국, 일본 장인들의 숨결이 문득 전해지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가 조용히 마주하는 시간에 감탄이 절로 났다.
배로 돌아와 맞이한 선상의 마지막 밤, 여행이란 단순히 머무른 장소의 풍경이 아니라 그 속에서 쌓아 올린 시간과 마음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림과 바쁨이 교차했던 낯선 공간에서 나는 조금 다른 속도로 숨 쉬는 법을 배웠다. 별일 없이 유쾌했던 여정이었고, 그래서 더 좋은 여행이었다.
말할 수 있는 빚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빚이 있다. 말할 수 있는 빚은 ‘반은 은행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집을 소개하거나, 운영에 부침을 겪는 업주가 희망을 찾을 때의 것이다. 겸손하고, 성실하고, 명예롭다. 반면 말할 수 없는 빚은 말해진 적 없기에 예를 들 수가 없다. 생존이나 중독에서 기인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 숨기고 감추느라 어둠 속에서 축축해진 그것들의 이미지는 오만하고, 나태하고, 굴욕적이다.
말할 수 없는 빚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지극히 사적인 채무에 대해서만 말하자고 다짐했다. 병든 몸으로 여러 직장을 전전하며 얻은 괴로운 부채,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빚을 내야 했던 슬픈 밤, 빚을 갚으며 많은 사람들이 내게 내어준 손과 품 같은 것을. 내게 빚은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수치스러운 절망이었고, 그 고립된 언어로 나는 나 자신을 회복시키는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러나 나의 부채감이 내가 속한 사회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글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국회 앞에 장갑차가 등장했던 어느 겨울 이후의 글쓰기는 더더욱 그랬다.
악보다 위선이 더 나쁜 것이라 외치는 이들의 폭주에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맞섰다. 그 싸움판 안에서 나는 채무자일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부채를 안기는 대부업자가 되기도, 누군가에겐 빚을 갚으라 고함치는 추심업자가 되기도 했다.
빚에도 얼굴이 있다면
어떤 빚은 종종 죄로 환원된다. 사람들은 대개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이들의 사정을 공적인 문제로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 질병과 사고로 인해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중독과 탈선으로 스스로 삶을 망가뜨린 사람들은 빚을 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무능하고 방탕한 존재가 된다.
세상은 이들의 고통을 당연한 불행으로 여기고, 이들의 실패는 개인의 불찰로 축소하여 재기의 기회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 정부는 113만명의 장기 연체 채무를 탕감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상환 능력을 상실한 장기 연체자의 빚을 전액 탕감하고, 자영업자에겐 원금의 90%까지 감면하는 방안이다. 정책의 내용이 알려지자 곧바로 반발이 일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주장, 채무에 관한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비난, 빚 갚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는 푸념까지. 낯설지 않았다.
정부의 탕감 조건은 ‘연체 기록 7년 이상, 연체 금액 5000만원 이하의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채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성실히 갚은 사람에 대한 배신’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제적 취약계층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채무조정은 이미 빚을 갚은 이들에게 상실감을 주거나 공정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채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채무의 고통을, 죄가 아닌 상황으로 규정하며 재기의 가능성을 만드는 최소한의 방안이다.
일기의 마지막 장
“대출금을 갚았어요. 신용점수가 올랐는지 확인하세요!” 병실에 앉아 금융 앱에서 보낸 메시지를 읽는다. 명랑한 메신저 알림음은 이자만큼 늘어나던 삶의 무게를 가볍게 비웃는다. 제일 힘들었을 때는 잠만 자고 싶었다. 말없이 잠들고, 가능하면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그 감정들을 언어로 옮기고 싶었다. 나의 슬픔과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동안엔 부채만 늘었다. 글을 연재하는 내내 마감을 제때 지키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기한을 멋대로 어기며 죄송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빚을 진 경험을 쓰면서 동시에 빚을 지는 나는 얼마나 오만하고 나태하며 굴욕적인가. 어떤 문장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병이 재발하는 기분이었다. 채무를 쓴다는 게 나를 회복시키기는커녕 더욱 고립시키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결코 멈추지 못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일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자괴감,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그 두 개의 감정은 마치 채무의 고통과 같았다. 자괴감과 무력감에서 동력을 얻다니, 어쩌면 나는 채무의 고통에 중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이 끝없이 빚을 지고 갚는 과정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고통에 적응해야 하고 그 불완전한 상태를 긍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악담을 써서 건넨다. 부디 당신에게도 채무가, 채무의 고통이 찾아들기를. 고통과 삶을 단단하게 묶어줄 빚이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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